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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_출장(1)

몽환마교 2019. 6. 13. 15:18

 출장일은 열흘 뒤로 잡혔다. 고위 임원과 같이 출장을 가니 그래도 좋은 것은 있었다비서실에서 모든 것을 결정했다. 재환의 일정이나 업무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모든 것은 정이사의 일정에 맞춰졌다. 재환에게는 그 어떤것도 묻지 않았다. 오직 여권을 제출하라는 연락이 와서 가져다 준게 전부였다. 원래 해외출장은 담당이 계획을 짜고 출장비를 청구하고, 출장비를 수령하고 필요에 따라 환전하고, 숙소에 항공편 예약까지 모두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정이사와의 출장은 달랐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재환이 일정이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가서 뭘 하는 것인지 출장비는 어떻게 되고 어떻게 숙박하는지 교통편은 어떻게 되는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재환이 직접 일정을 짜려고 했더니 비서실에서는 우리가 진행하니 대기하라는 연락뿐이였다. 도대체가 아는게 없었다. 비서실에 물어봐도 정확한 것은 확정되지 않았다는 대답 뿐이었다. 도대체 제 날짜에 출장을 가는 것인지 안 가는 것인지 알 수 도 없는 날이 하루하루 지나갔다. 그러다 출발 사흘 전에 출장비를 수령하라는 연락이 와서 출장비를 수령했는데 그 뿐이었다. 참으로 부담이 되는 출장이었다. 더구나 정이사를 모시고 둘만 가는 출장이라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출장 이틀 전에 정이사로부터 호출이 왔다.

 

임과장, 준비는 다 되었지

 

 

무슨 준비를 어떻게 하라고 얘기도 안 했는데 무슨 준비를 해야하는 것인지 알 수 는 없었지만, 안 되었다고는 할 수 없어 다 되었다고 대답은 해버렸다.

 

이번에 가서 할게 많아, 여기저기 인사도 많이 해야하고

 

사전에 연락을 해두어야 하니 누구를 만나시는지와 어떤 일정으로 움직이는지 말씀해 주시면 준비를 하겠습니다

 

아니야 현지 지사에 준비를 하라고 일러줬으니 오늘 아마 연락이 오겠지. 임과장에게도 함께 매일을 보내라고 했으니 오늘 메일이 오면 검토해보고 필요한게 있으면 내일 얘기 할 수 있도록

 

  고위 임원과의 대화는 군더더기가 없다.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도 없거니와 밑에 사람으로부터 이런저런 조언을 듣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모든 임원은 자기가 다 잘나서 그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하며, 자기는 밑의 직원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맞는 말일 수 도 있다. 모든 임원은 다 그 자리에 있을 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다.

 

  정이사와의 대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냥 묻는 말에 대답하고 시키는 것에는 토 달 필요없이 수행하면 된다. 볼리비아에는 왜 가는지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가서는 어떤 일을 할 건지 아무것도 모른 채 출장 준비를 한다. 볼리비아 지사장으로부터 저녁 늦게 메일이 왔다. 메일의 내용은 간단했다. 호텔 예약 사항과 정부와 ABC(볼리비아 도로청)측 인사를 만나는 일정까지 정해져 있었다. 정부 측 인사는 부통령과 각 부처의 장관을 만나는 것으로 되어있었고 ABC측 인사는 청장을 만나는 것으로 되어있다. 다른 일정으로는 우선 포토시에 있는 공사현장을 방문하고 그 다음에 현지 인사를 만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수행원은 지사장과 관리부장, 운전기사 2, 현지통역, 경호원 2명 등 모두 7명에 차량은 두 대로 편성되었다.

 

니기미

 

  기집년 한년 가는데 너무 거창하다. 지난 번에 상무를 모시고 갔을 때에는 현지 관리부장에 공항으로 차량만 보냈는데 오너가 임원이라 그런지 대접이 틀리다. 처음 도착하는 라파스부터 현지 수행원이 계속 동행을 하게 되어 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하지만 입에 황금 숟가락을 물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리 출세해도 당해 낼 수 가 없다. 부모 잘 만난 복이 복 중에 제일인데 그 복을 어떻게 당해낼 것인가?

 

  오랜만에 일찍 들어간 집은 낯설었다. 재환은 아직 아이가 없다. 마누라 김지수는 맞벌이를 한다. 맞벌이라 하면 뭔가 대단한 것을 할 것 같지만 재환의 마누라는 방문 교사를 한다. 자기 말로는 한 50명 정도를 관리하며 월 130정도 번다고 하는데 재환은 지수가 버는 수입에 대해서 얼마를 버는지 또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서 물어본 적 이 없다. 재환 역시 신혼 초창기에는 가정의 경제권을 쥐고 돈을 관리하려고 해보았지만 그런 생각은 애시 당초 버렸다. 가정의 평화는 여자의 손에서 좌우된다. 이것은 부모님의 신조였다. 공무원이였던 아버지는 출, 퇴근을 하고 어머니께 용돈을 받아 쓰는 것 외에는 어떤 형태의 딴주머니도 차 본 적이 없었다. 마치 교과서처럼 한치의 오차도 없이 평생 생활을 하셨고 또 그런 생활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재환 역시 마찬가지 였다. 가정의 일은 여자가 알아서 하면 된다는 것이 그동안 몸으로 체험한 결과였다. 가정이 시끄럽고 복잡한 것은 남편이 문제다.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만 잘하면 된다. 이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자 재환의 지론이었다.

 

  마누라 지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참으로 드문 일이지만 재환은 청소와 설거지를 했다. 집안 청소를 한 것이 언제인지 가물가물 했다. 매일 접대에 야근에 집에 오면 쓰러져 자고, 주말에는 내내 잤다. 그러다 일어나 TV를 보고 밥을 먹고 또 잤다. 지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름 속이 상했던 모양이다. 종종 가사일을 분담하자고 얘기했지만 방문 교사는 시간이 많은지라 어찌되었든 맞벌이를 한다고는 하지만 집안일은 자연스레 지수의 몫이 되었다.

 

  오랜만에 해보는 집안일은 정말 낯설었다. 어디에 청소기가 있는지, 어디에 방걸레가 있는지 조차 알 수 가 없었다. 매일 밤 늦게 집에 들어오면 정리되어 있는 집만 봐 왔기에 청소를 하는 지수의 모습을 본 기억도 가물가물 하다. 가끔은 주말에 전등을 갈거나 이불 빨래를 널어주는 일 따위는 해봤지만 그것도 낯선 일이다.

 

  청소를 마치고 저녁까지 준비하려다 나름 너무 벅찬 것 같기에 관두었다. 그냥 지수가 오면 외식분위기 내면서 시켜먹자고 할 참이었다. 재환은 출장과 관련한 짐을 쌌다. 혼자 가거나 일상적인 출장은 아니라서 도대체 어디까지 준비를 하고 어디까지 챙겨야 할지 알 수 가 없었다. 내가 따까리나 짐꾼으로 따라가는 건지, 아니면 뭐 시킬 일이라도 있어서 그런건지 좆도 알 수 가 없다. 니미 속옷 몇벌과 와이셔츠, 양말만 몇 개 넣고 출장 가방 싸는 것을 끝냈다. 그래도 지수가 있으면 뭐 좀 챙겨줬을 텐데 속옷 찾고 양말 찾는 것도 나름 피곤했다. 집안일에 너무 관심을 안 가진게 분명했다.

 

  도어록이 눌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지수가 들어 온다.

 

어쩐 일이야

 

내일 출장 가

 

아니 출장 간다고 얘기 한 적도 없었잖아?”

 

회사 이사가 가는 데 갑자기 수행하래서 긴급하게 가는거야

 

몇일 동안 가?”

 

“2주 정도, 정확한 복귀일은 아직 미정이야

 

저녁은

 

시켜 먹자

 

  저녁은 오랜만에 지수가 좋아하는 해물찜을 시켜 먹었다. 접대로 회식으로 숱하게 먹은 해물찜이다. 배달되어 온 해물찜은 영 맛이 없다. 한 눈에 봐도 냉동 해물임이 분명한 오징어, 조개, 새우 등등을 조미료를 듬뿍 넣고 고춧가루와 설탕으로 범벅을 한 전형적인 배달음식이다그런 배달음식도 지수는 잘 먹는다. 재환은 늦게 퇴근을 하고 매일 저녁 혼자 저녁을 먹었을 지수를 생각하니 재환은 은근 미안한 마음이 좀 든다.

 

참 맛있어

 

  작은 것에 만족을 하는 저 여자가 내 마누라였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주말이면 가끔 같이 나가 외식도 하고 바람도 쐬고 좀 그랬어야 하는데 왜 재환은 그러지 못했는지 자책감이 들었다. 결혼 한 지 3년차, 연애까지 합치면 8년을 지나 거의 9, 일년 만 더 채우면 십년이다. 행복하게 해주겠노라 다짐을 하고, 장인어른과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 함께 살아 온 지수였지만 결혼 이후 둘의 삶은 다른 집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함의 연속이다. 지수가 아침 일찍 일어나 차려놓은 아침을 속이 안 좋다는 핑계와 늦었다는 핑계로 거의 매일 건너 뛸때면 가끔은 이러다 나중에 황혼 이혼이라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종종 들고는 했다. 거기에 둘 사이에 아직 아기가 없는 것도 더욱 문제였다. 신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고, 배란일에 맞추어 관계를 가진다거나 인공수정을 해본다거나 하는 방법을 몇차례나 해보았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수의 배란일에 맞추어 반강제적으로 하는 섹스는 정말 힘이 들고 성욕도 일어나지 않았다. 남들과 같다. 아기가 없는 부부가 우리 뿐만은 아니다. 신체적으로 문제가 없으니 좀 만 노력하면 곧 생길 것이다.

 

  배달음식이라 그런지 치우는 것도 쉽다. 같이 따라온 비닐봉투에 모든 것을 쓸어담는 것으로 뒤처리가 끝났다. 그리고 현관문 밖에 내놓는 것으로 집안 정리는 끝이 났다. 편리한 세상이다. 해외 출장을 여러나라를 다녀 본 적이 있는 재환이지만 한국만큼 배달음식 문화가 완벽한 나라는 없었다. 24시간 거의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것도 집에서 말이다. 외국에서 온 바이어나 거래처 사람에게 호텔에서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시켜주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심지어는 맥도날드 햄버거마저 24시간 배달이 된다. 정말 좋은 나라이다.